수천년의 역사와 더불어 진행되는 중국 醫藥學(의약학)은 고대 唯物論(유물론)과 辨證法(변증법) 사상의 영양을 받고 자란 독특한 理論體系(이론체계)를 형성하고 질병에 대한 풍부한 임상 경험을 통해 축적된 우수한 결과로써 중국문화와 더불어 인류의 건강 증진을 담보하는 의학의 한 구성 부분으로 확고한 위치를 새롭게 설정해 나가고 있다.
이론체계의 형성과 발전
醫學(의학)을 인체의 生理(생리)와 病理(병리) 및 疾病(질병)의 診斷(진단)과 預防(예방) 그리고 治療(치료) 등을 진행하는 임상을 통하여 실천하고 연구하는 과학으로서 중국인은 고대로부터 唯物論(유물론)과 辨證法(변증법)의 독특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陰陽五行(음양오행) 학설에 깊은 영향을 받아 이론체계를 점진적으로 확립시킨 것이다.
唯物論(유물론)을 관통하고 있는 整體觀念(정체관념) 즉 전일적 관념의 사상아래 인체와 자연계의 유기적 관계를 파악하게 되었고 陰陽學說(음양학설)과 五行學說(오행학설)에 편입되어 그 이론을 주도하는 氣(기)적 차원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臟腑(장부)와 經絡(경락)의 생리와 병리를 기초로 하는 辨證論治(변증론치)를 診療(진료)의 특점으로 의학의 이론체계를 확립 발전시킨 것이다.
春秋戰國(춘추전국) 시기에 이르러 정치, 경제, 문화 각 분야가 현저한 발전을 거듭 하게 됨으로써 이 같은 사회적 급격한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副應(부응)한 중국민족은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배경으로 응분한 답보를 진행하는 가운데 중국에 현존하는 醫學文獻(의학문헌) 중에 최초의 典籍(전적)이 되는 黃帝內經(황제내경)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황제내경의 출현으로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의료성과와 치료경험을 총망라하고 의학의 독특한 이론체계로 인체의 生理(생리)와 病理(병리) 및 질병의 진단, 치료, 예방 등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醫學(의학)의 이론적 기초를 닦아 놓았다. 그 내용에는 臟象(장상), 經絡(경락), 病機(병기), 診斷法(진단법), 辨證(변증), 治療原則(치료원칙) 및 針灸(침구), 湯液治療(탕액치료) 등을 서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陰陽(음양), 五行(오행), 氣(기), 天人關系(천인관계), 形身關系(형신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 哲學(철학)분야에 존재하는 일련의 중대 思案(사안)들에 대하여도 깊은 연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黃帝內經(황제내경)은 이와 같이 당시 선진적 철학사상을 바탕으로 醫學(의학)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달성한 의학의 발전성과에 기초하여 철학이론을 더욱 풍부히 향상시킴으로 先秦(선진) 이래의 유물론적 철학사상을 진일보 발전 시켰다.
한편 黃帝內經(황제내경)이 오늘날까지도 감탄하게 하는 많은 내용들은 그 당시에 세계적 수준을 훨씬 超越(초월)하였다고 보는 점이다. 形態學(형태학)註1 측면에서 볼 때 인체의 骨格(골격), 血脈(혈맥)의 길이 內臟器官(내장기관)의 대소와 그 용량 등에 관한 모든 기록들이 실재와 기본적으로 부합되고 있다.
秦越人(진월인)에 의하여 저술되고 漢朝(한조)이전에 완성된 難經(난경)도 黃帝內經(황제내경)에 못지않은 훌륭한 의학고전으로서 生理(생리), 病理(병리), 診斷(진단), 治療(치료) 등 각 방면의 매우 훌륭한 내용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內經(내경)을 보충하였으며 內經(내경)과 함께 후세의 임상실천을 지도하는 이론적 기초를 닦아 놓았다.
兩漢(양한 BC206~AD219) 시기에 중국 醫藥學(의약학)은 뚜렷한 진보와 발전을 가져왔다. 東漢(동한, 후한) 말년의 저명한 의학가 張仲景(장중경 기원 150~219년)은 內經(내경)과 難經(난경)의 이론에 기초하고, 先人(선인)과 당대의 의료인들의 의학 성과를 총망라하고 여기에 자신의 임상경험을 결부시켜 집대성한 傷寒論(상한론)과 金匱要略(금궤요략)으로 전해진 傷寒雜病論(상한잡병론)을 저술 하였다. 이 傷寒論(상한론)은 辨證論治(변증론치)를 적용한 첫 번째 저서가 되며 또 한편《素問 ․ 熱論》에 기초하여 六經(육경, 太陽, 陽明, 少陽, 太陰, 少陰, 厥陰) 辨證論治(변증론치)의 강령을 확립하고 六經(육경)의 形證(형증)과 分經(분경)의 변증론치 원칙을 제출하였다.
金匱要略(금궤요략)은 40여종의 질병과 262개 처방을 기재하고, 臟腑(장부)의 病機理論(병기이론)으로서 證勢(증세)에 따라 각기 병리적 현상을 설명하였다. 한편 金匱要略(금궤요략)은 黃帝內經(황제내경)의 病因學說(병인학설)을 발전시켰다. 張仲景(장중경)은 여기서 모든 질병의 진단은 다음 3가지 정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였는데 하나는 經絡(경락)이 邪氣(사기)를 받아 臟腑(장부)에 침입한 것으로 이는 內臟(내장)에 기인한 것이고, 하나는 四肢九竅(사지구규)에 혈맥이 막혀 불통하는 것으로 이는 피부 표층에 상해를 입은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房事(방사), 쇠붙이, 벌레, 짐승에 상한 것이다. 라고 제출 하였다. 이는 후세에 三因學說(삼인학설)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傷寒論(상한론)과 金匱要略(금궤요략)은 六經辨證(육경변증)과 臟腑辨證(장부변증)의 방법으로 外感病(외감병)과 內傷(내상)에 의한 雜病(잡병)의 치료방법을 확정함으로써 辨證論治(변증론치)의 이론적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이로써 임상의학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확립시켰다.
중국의 역대 醫學家(의학가)들은 內經(내경), 傷寒雜病論(상한잡병론)에 기초하여 각기 다른 방면으로 의학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예를 들면 隋朝(수조)의 巢元方(소원방) 등은 첫 번째 病因病機症候學(병인병기증후학)인 전문저서로써 諸病源候論(제병원후론)을 저술하였고 宋朝(송조)의 陣無擇(진무택)은 三因極一病證方論(삼인극일병증방론)을 서술하여 病因學(병인학) 측면에서 유명한 三因學說(삼인학설)을 제출하였으며, 宋朝(송조)때에 錢乙(전을)에 의한 小兒藥證直訣(소아약증직결)은 臟腑(장부)의 병리적 개괄과 그 치료에 대한 기원을 열어놓았다. 金 ․ 元時期(금 ․ 원시기)에는 각이한 특색을 가진 의학파벌이 더욱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劉完素(유완소), 張從正(장종정), 李杲(이고), 朱丹溪(주단계)이다. 이들을 가리켜서 후세에 사람들이 金元四大家(금원사대가註2)라고 불렀다.
明朝(명조)의 趙獻可(조헌가), 張景岳(장경악) 등이 제출한 命門學說(명문학설) 역시 臟象學說(장상학설)에 새로운 내용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劉完素(유완소)에 의해 溫病學(온병학)은 사계절 온병의 발생, 발전법칙(病機)과 그 진단 및 치료방법을 연구하는 의학의 한 분과로써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는 장기간에 걸친 인체의 외감적 열병에 대해 경험을 통한 遺産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內經(내경), 難經(난경), 傷寒雜病論(상한잡병론) 등 저서에 기초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漢朝(한조) 이후 의학가 들의 부단한 연구와 보충에 의하여 발전되었고 점차 독립하여 의학의 한 분과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明朝(명조)의 吳又可(오우가)는 자신의 저서 溫疫論(온역론)에서 溫疫(온역)의 병인은 “風, 寒, 暑, 濕(풍,한,서,습)에서 온 것이 아니라 천지간의 어떤 특이한 氣(기)에서 온 것이며” 表皮(표피)를 통하여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입과 코를 통하여 전염된다고 하였다. 이 이론에 의하여 온병(특히 온역)의 病因學(병인학)은 한걸음 크게 발전 하였다. 淸朝(청조)에 이르러온병학 이론이 점차 완벽하여졌다. 葉天士(엽천사), 吳鞠通(오국통) 등 온병학자 들이 衛氣營血(위기영혈), 三焦(삼초)를 핵심으로 하는 溫病辨證論治理論(온병변증론치이론)과 방법을 창립함으로써 온병학은 因, 證, 脈, 治(인,증,맥,치) 등 측면에서 완전한 이론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淸朝(청조)의 王淸任(왕청임)은 解剖(해부)를 중시하여 醫林改錯(의림개착)이란 저서를 통해 인체해부 방면에 대한 古醫書(고의서)의 착오를 지적 및 개정하였고, 瘀血致病(어혈치병)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현재 東醫學(동의학)과 西醫學(서의학)의 의료인들은 역대의 의학문헌을 정리, 연구하는 한편 현대 과학의 방법을 적용하여 東醫學(동의학) 基礎理論(기초이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經絡(경락)과 臟腑(장부)에 대한 연구에 일정한 진전을 가져왔다.
註1 ① 食管(식관)과 腸(장)의 비례는 1 : 35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대의 해부학에 의하
여 확인된 1 : 37과 근사하다.
② 血液循環(혈액순환)에 관하여《素問 ․ 痿論》에서 “心(심)을 主身(주신)으로 하는 血脈(혈
맥)”이라고 제출하였는데 이는《素問 ․ 擧痛論》에 혈액이 혈관 안에서 끊임없이 운행하
고 끊임없이 순행한다. “고 한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로 미루어 보
건대 動脈(동맥)과 靜脈(정맥)에 대해서도 일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黃帝內經(황제내경)은 1628년에 血液循環(혈액순환)을 발견한 영국의 ”하비“보
다도 1000여년이나 앞서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알 수 있다.
註2 金元四大家(금원사대가)
劉完素(유완소) : 火(화)와 熱(열)로 立論(입론)하였고 “六氣(육기)는 모두 火氣(화기)의 生長
(생장)에서 오며 ”五志(오지)가 과하면 火(화)가 생긴다.“는 說(설)을 제창
하였으며 따라서 이를 다스리는 데는 寒冷(한냉)한 성질의 약을 위주로 써
야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유완소를 寒冷波(한냉파)라고
불렀다. 따라서 그의 학술 관점은 溫病學說(온병학설)의 형성에 매우 큰
계시를 주었다.
張從正(장종정) : 병은 邪氣(사기)에서 생기므로 “邪氣(사기)를 제거하면 병세가 나아진다.”
고 인정하고 汗 . 吐 ․ 下(한토하)는 邪氣(사기)를 제거하고 병을없애는 3가
지 주요한 방법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장종정을 攻
下波(공하파)라고 불렀다.
李東垣(이동원) : 李杲(이고) - “脾(비)와 胃(위)에 내상이 오면 백병이 생긴다.”는 논점을 제
출하고 그 치료에 있어서는 비와 위를 補(보)하는 약을 위주로 써야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후세사람들은 李東垣(이동원)을 補土波(보토파)라고 불렀
다.
朱丹溪(주단계) : “陽(양)은 항상 남음이 있고 陰(음)은 항상 부족하다.”고 하면서 相火論(상
화론)을 제창하였고 그 치료에 있어서는 陰(음)을 돕고 火熱(화열)을 내리
는 약을 위주로 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주단계를 養陰波(양음파)라고 불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金元四大家(금원사대가)들은 火熱論(화열론), 攻邪論(공사론), 補土
論(보토론), 養陰論(양음론)등 각기 다른 立論(입론)에 의하여 發明(발명)과 創造(창조)를 하
였고 각기 다른 측면에서 의학의 이론을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Komentarze